- 좋은 사람? 싫은 사람? -방향을 바꿔라- (11월 9일 청소년부 설교)
- 홍현희 2025.11.9 조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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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좋은 사람? 싫은 사람? -방향을 바꿔라
본문: 로마서 12장 14–18절
여러분, 우리가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겉으로는 “안녕하세요~” 하면서 웃고 있지만, 그 순간 우리 머릿속은 엄청 빠르게 돌아갑니다. ‘이 사람이 나랑 잘 맞을까? 아니면 좀 거리감이 있을까?’ 우린 본능적으로 나랑 비슷한 점을 찾고, 다른 점을 스캔해요. 나이, 취향, 말투, 성격, 혹은 좋아하는 음식이나 연예인까지.
그리고 비슷한 게 많으면 “이 사람 좋다!” 하고 마음이 열리죠.
반대로 너무 다르면 “음... 좀 피곤할 것 같아.” 하고 마음이 닫힙니다.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에요.
문제는, 이런 ‘편가르기’가 쌓이면 결국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생기는 안정감에 우리가 익숙해진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우리 편이 이겨야 한다.” “쟤는 좀 별로야.” 라는 식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며 서서히 갈등이 자라기 시작하죠.
오늘 본문 말씀 위에 붙은 성경책에 작은 소제목이 붙어있어요, “그리스도인의 생활.” 이라고 되어 있죠.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어요. 1–11장은 ‘이론편’, 12장부터는 ‘실전편’입니다. 12장부터 나오는 실전편에서는 신앙의 실제 모습이 우리의 말, 태도, 관계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를 바울이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줍니다.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14절이에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러분, 벌써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멈칫하게 되죠.. 벌써 쉽지 않죠? 나를 괴롭히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하라니요. 우린 본능적으로 그 반대를 하고 싶죠. 마치 지난번 설교에 나온 요나처럼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잘되면 괜히 억울하고, 넘어지면 솔직히 속이 시원하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거꾸로 말합니다. 그 사람을 향해 축복하라고 하죠.
여기서 ‘축복하다, 저주하다’ 단어를 들으면 우리가 보통을 잘 안하는, 자주 안 하는 그런 것 같잖아요. 그런데 헬라어로 ‘축복하라’는 헬라어로 eulogéite — eu(좋게) + logein(말하다).
즉, ‘좋게 말하라’는 뜻이에요. 또, ‘저주하다’(καταρᾶσθε)는 ‘헐뜯다, 악담하다,’는 의미예요.그러니까 이 구절을 요즘식으로 바꾸면 이겁니다. “뒷담화하지 말고, 좋은 말을 하라.”
여러분 우리 학교나 단톡방, SNS에서 진짜 어려운 게 바로 이거예요. 나랑 잘 안 맞는 친구, 나를 무시했던 사람 이야기 나오면 나쁘게 말하게 되잖아요. 난 걔 뭐가 맘에 안 들어 , 난 걔 이해가 안가..하면서 금방 안 좋은 말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바울은 “그 말의 방향을 바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마음의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해가는지를 결정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걸음은 바로 말의 변화예요. 나쁜 평 대신 좋은 말을, 판단 대신 축복의 언어를 선택하라는 것이에요.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예요. 12장 실전편 시작하는 1절 말씀이
“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몸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실재적인 삶으로 끌어 내려오게 해요.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몸으로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거예요. 고성준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영적싸움은 육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은 허상이 아니에요. 우리 삶 속에서,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특별한 종교적 행위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매우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복음의 태도라고 말하고 있어요. 누군가를 향한 우리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 태도 하나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보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정말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짧은 구절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줘요. 솔직히, 함께 우는 건 그나마 쉬워요. 누가 힘들다고 하면 위로해 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어려운 건 함께 기뻐하는 거예요. 특히 경쟁이 많은 세상에선, 남의 기쁨이 내 실패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남의 기쁨을 시기하지 말고, 그 기쁨 안에 들어가라.”세례 요한이 그랬어요.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가버렸는데,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어도, 신랑이신 예수의 음성을 듣는 친구로서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했어요. 주인공이 아니어도 기뻐할 수 있는 마음. 그게 바로 예수님을 닮은 마음이에요.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 사람의 삶 속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해요. 여러분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처음에는 공감이 안 되다가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면 마음이 달라질 때가 있죠. 그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 판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감이 자리 잡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바로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 있는 열쇠’입니다
전도사님이 2주전에 목회실습을 다녀왔잖아요. 원주 영강교회를 다녀왔어요.
거기서 담임목사님, 또 청소년부 목사님을 보며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며 좋은 시간들을 가졌는데 이 실습기간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사실 같이 갔던 우리 팀원들 안에 작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랑이 싹텄다는 것, 서로에 대한 마음의 문들을 열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부분 같아요.
저희 팀은 다 너무나 다른 백그라운드와 연령과 가치관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어요. 30대 2명 40대 2명 50대 2명 60대 2명으로 이루어져서 신학도 정통주의파, 자유주의파, 정치도 좌파, 우파, 뭐 너무나 다른 생각들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중에 한 장로님이 계셨는데 저희가 특송을 하는데 계속 4부 합창을 하자고 주장하시는 거예요. 짧은 시간에 다 준비하기가 어렵지 않느냐고 다른 곡 간단하게 하자고 한 분이 단톡방에 올리셨는데 장로님이 또 이어서 계속 성가 4부 합창곡을 올리시는 거예요. 끝까지 성가곡을 계속 올리셔서... 왜 계속 성가를 고집하시지? 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장로님은 작은 시골 교회 다니셨는데, 거기 성가대가 그 장로님, 그 장로님의 와이프, 그 장로님의 첫째 동생, 첫째동생 와이프, 둘째 동생, 둘째 동생 와이프, 이렇게 6명으로 구성된 거예요. 그 6분이 계속 합창으로 성가대를 하시고 계셨던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셨던 거예요. 아~ 그래서 이렇게 계속 4부합창 성가를 하시려고 했구나~~ 이해가 되었어요.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 해보니 너무 귀여우시고 재밌으신 분이셨어요~ 이렇게 그 사람의 이야기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 안 될 것들이 사실 별로 없어요.
자, 이어서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말씀하죠.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같이하라’는 건 생각이 똑같아지라는 뜻이 아니에요.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φρονεῖν(프로네인)은 단순히 ‘생각하다’가 아니라 ‘지향하다’, ‘마음을 두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마음을 같이하라”는 것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방향의 일치라고 할 수 있어요.사람은 각각 저마다 달라요. 세대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보는 관점이 다르죠. 그래서 의견도 다 달라요. 그러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그 차이는 오히려 공동체를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이 방향이에요. 그럼 그것을 위해 여러 다양한 모양이 나올 수 있죠. 한 사람은 병원비를 도와주며 경제적으로 힘을 보태고, 또 다른 사람은 음식을 해다 주며 손발로 사랑을 나눕니다. 어떤 이는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건네고, 또 다른 이는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 처리해 줍니다. 하는 일은 모두 다르지만, 그 마음은 하나였어요. 그 사람의 회복과 위로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마음을 같이함’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방향과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방향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고, 세상이 높아지려는 방향과 정반대로 자신을 낮추는 길을 걸으셨던 것처럼. 더 낮은 곳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거예요. 왜요? 바로 그 자리에서 진짜 교제가 시작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도 슈퍼맨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그 낮은 모습, 십자가의 자리로 오신 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며 마음을 같이하고 교제하기 원하셨기 때문이에요. 낮은 자리로 향하는 마음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아요. 그곳에는 경쟁이 아니라 이해가 있고, 비교가 아니라 연대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제 마지막으로 17-18절 보죠. 먼저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인간의 본성은 공격을 받으면 즉각 반응합니다. 상처받으면 상처로, 모욕을 받으면 모욕으로 되갚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정당한 응답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바울은 그런 본능적인 반응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대신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합니다. ‘도모하라’는 “미리 생각하다, 앞서 준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는 악은 즉흥적이지만, 선은 준비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으로 대응하지 말고, 선을 미리 계획하라는 거예요. 관계 속에서 항상 ‘어떻게 하면 선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를 미리 마음에 품으라는 말이죠
그리고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고 합니다. 바울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어요. 바울은 모든 사람과 완전히 화목한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알았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이라 단서가 붙죠. 그런데 거기 너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고 되어 있어요. 첫걸음이 바로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만큼, 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 ‘ 이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반응을 바꾸려 하기보다,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부터 할 수 있는 만큼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몫이에요.
이번주 금요심야 때 육목사님이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여름엔 다 푸르러서 자기 색깔이 나오지 않지만, 가을에는 나무마다, 노란, 빨강. 다홍 ...저마다 각자 고유의 색을 드러낸다고.... 우리는 다 색깔이 달라요. 그런데 그것이 함께 어우러져서 산을 울긋불긋 물들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듯,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인정해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요. 오늘 우리 친구들이 그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사람/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랑 맞는 사람/안 맞는 사람으로 나누어 선을 그어버리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돌보고 격려해주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성북교회 청소년부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말’을 좋은 말로, ‘마음’을 그 사람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 함께 공감하는 마음으로, ‘반응’을 선을 준비한 반응으로 방향을 바꾸어보세요. 그렇게 우리가 조금씩 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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