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 there an available room? (12월 21일 청소년부 설교)
- 홍현희 2025.12.21 조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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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월터 레인-성탄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죠.
트리를 꾸미고, 선물을 준비하고, 친구들에게 카드도 쓰고, 또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뻐합니다. 우리 청소년부도 성탄 축하의 밤을 위해 성극과 댄스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전도사님도 어렸을 때 성탄절 때마다 여러 성극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성극이 하나 있다면 바로 “빈방 있습니까?”라는 성극입니다.
이 성극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어요. 어느 교회의 고등부 연극반이 성탄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연출을 맡은 선생님이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학생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깁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덕구였는데요. 덕구는 선천적인 언어장애가 있었고, 늘 사람들 곁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었고, 잘 끼지 못하는 성격의 아이였어요. 무엇을 하든 주목받기보다는 소외되기 쉬웠던 아이였습니다. 그런 덕구에게도 선생님은 성탄절 성극 역할을 하나 맡겨주고 싶었어요. 덕구가 다른 친구들이랑 함께 연극에 참여했으면 했고, 또 이것을 계기로 덕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출 선생님은 덕구에게 여관 주인 역할을 맡깁니다. 사실 그 역할에는 대사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빈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이 한마디라면 덕구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성탄절 전야, 무대의 막이 오르고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연극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되었죠. 그리고 드디어 그 장면이 찾아옵니다.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방을 구하기 위해 여관 문을 두드리는 장면에서, 여관 주인 덕구가 등장합니다. 이제 덕구는 연습한 대사, “빈방이 없습니다”를 말하기만 하면 됐어요.
그런데 덕구가 그 말을 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바라보던 덕구는, 결국 전혀 다른 말을 외치고 맙니다.
“가지 마세요. 우리 집에 방이 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마구간에 가지 마세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아요.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고, 연극은 완전히 엉망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사는 틀어졌고, 계획했던 흐름은 모두 무너졌어요. 누구나 실패한 연극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사람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날의 성극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극이었다는 것을요. 그 연극은 사람들을 웃게 했고, 동시에 울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탄절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말로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어떤 자리를 내어드리고 있는가?”
이 성극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성탄의 이야기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누가복음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re was no guest room available for them.”
여기서 핵심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available 입니다. 여러분 available이 무슨 뜻이죠? “사용 가능한, 이용 가능한”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하냐면, 그날 베들레헴에 방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은 있었어요. 그러나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거죠.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용할 수 있는 방, 곧 available한 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이 많았을까요? 오늘 본문 1절이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여기 나오는 아구스도는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제국을 제대로 다스리려면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세금을 잘 걷고, 군대를 잘 조직하려면 먼저 사람이 몇 명인지, 어디에 누가 사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전 제국에 인구조사를 명령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자기 고향으로 몰려들었고, 베들레헴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available 한 방이 없었던 것이죠.
예전에 Bill Wilson이라는 사람이 쓴 「Whose Child Is This?」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Bill Wilson은 뉴욕 할렘가 한복판으로 들어가 폭력과 마약, 가난과 범죄가 일상이었고, 학교도 정부도 이미 포기한 것처럼 보이던 그곳에서 선교했던 목사님입니다. 할렘가의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고, Bill은 그런 아이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은 Bill에게 말했습니다. “거긴 위험해.” “거긴 안 돼.” “아무도 안 바뀌어.” “네가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나 Bill은 “누군가 해주겠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결단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야 한다.” 그 한 사람의 결단을 통해 할렘가에 복음이 전해지고, 아이들에게 희망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available한 사람이 되기로 결단할 때, 한 사람을 통해 어둠 속에 빛이 퍼져 나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Bill Wilson의 말 중에 잊히지 않는 문장이 있습니다.
“God is not looking for people who have ability, but availability. That’s all you need.”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 available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성탄의 밤도 그랬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예수님께 방이 내어주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악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방이 이미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14장의 큰 잔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합니다. 때가 되어 종을 보내 초대된 사람들에게 “오라”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초대를 사양합니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나는 밭을 샀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다.”
“나는 장가 들었다.”
이유들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틀린 말도 아니고, 나쁜 이유도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정당한 이유들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악해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잔치에 응답할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밭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소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가정이 나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문제는 좋은 것들도 하나님보다 더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하나님의 초청을 밀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비슷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일정, 너무 많은 분주함.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머물 자리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나중에요.” 라는 우리의 말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어요. “지금 제 안에는 하나님을 위한 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말씀이 지루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너무 바쁘고, 너무 가득 차 있고, 너무 지쳐 있고, 너무 걱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초청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그런데 누가복음 14장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길과 산울타리로 나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사람들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자리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 “빈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2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 밤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가난한 방식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왜 하필 그때였습니까?” “왜 사람들이 가장 바쁠 때 보내셨습니까?” “하필이면 왜 호적하라고 아우구스가 명을 내려서, 가장 사람들이 방에 가득 찰 때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그 밤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셨죠.
아담은 흙, 곧 earth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earth에 오셨을 때, 이 땅에는 그분을 위한 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의 문제, 곧 우리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방이 너무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이 들어오시지 못한 것입니다.
2000년 전 아기 예수님이 이 따엥 오실때에는 available한 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문을 연 사람이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데도 임신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 앞에서, 약혼한 요셉에게 파혼당할 수도 있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을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렸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주님께 available 하게 자신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available 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을 묻지 않으십니다.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단 하나를 물으십니다. “Is there an available room?”
자리를 내어드린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한 칸, 시간의 한 칸, 관심의 한 칸을 먼저 주님께 내어드려서, 주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available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복음의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은 완벽한 방만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굿간에도 오셨던 분입니다. 문제는 완벽함이 아니라 문이 열려 있는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께 문을 열어드리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 지금은 바빠요”라며 문을 닫고 있나요? “주님, 제 마음은 복잡하지만, 완벽하지 않지만 들어오실 자리는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 고백이 예수님께서 오실 성탄의 길을 엽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계십니다. “Is there an available room?”
이번 성탄에는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능력은 부족하지만 저는 available 합니다. 2000년 전에는 주님이 가장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마굿간에 오셔야 했지만, 이번 성탄에는 내 마음의 방에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며 임하소서.”
그렇게 여러분의 마음 물을 열고 주님께 available한 사람이 될 때 성탄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 마음 한가운데 오시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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