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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다가 화가 나고 지칠때 (11월30일 청소년부 설교 요약) ) 홍현희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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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섬기다가 화가 나고 지칠 때

본문: 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 대한 설교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그동안 오늘 본문에 대한 많은 설교와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봉사를 하고 섬기는 것으로 대표되는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 듣던 마리아의 모습을 비교하며 봉사보다 말씀 듣는 게 중요하고 좋다.라는 설교도 있고,

마르다가 섬기는 것도 다 좋고 중요한 일이었는데 기쁨으로 하지 못하고 염려함으로 한 것이 잘못된 부분이라고 하시는 설교도 있었고, , 어떤 목사님은 종합적으로 마리아의 마음을 가지고 마르다처럼 봉사 하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여러 설교를 들었었지만, 제겐 좀처럼 잘 잡히지 않았던 본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 다시 한번 예수님이 이 본문을 통해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던 것일까? 생각해보며, 또 이 본문의 소재인 섬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크게 세 덩어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70인을 둘 씩 짝지어 보내고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과 예수님의 감사기도, 두 번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본문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 이야기 사이에는 겉보기에는 접점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누가는 이 이야기들을 하나의 정교한 흐름 안에 배치합니다

바로 무엇을 하느냐?”라는 질문에서 어떤 관계 안에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흐름입니다.

 

먼저 10장 첫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칠십 인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죠. 그리고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기뻐하면서 돌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10:17절 중간입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17)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조금 예상 밖입니다. 20 절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예수님은 능력, 열매, 성과를 부정하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진짜 기쁨의 중심은, 네가 무엇을 했느냐, 무슨 성과를 냈느냐가 아니라, 네가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이다.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고 말하십니다

 

다음 10장에 두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그 이야기 시작은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께 나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25절 중간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영생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이야기 해주시면서 마지막에 36절에 율법 교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

무엇을 해야하느냐보다 사마리아인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니?” 관계에 중점을 두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 본문인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이 이야기도 이러한 흐름 안에,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지는 내용임을 생각하시고 한번 차근차근 이야기를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8절 입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10:38) 여기서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마르다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름이 마르다라는 것을 왜 언급했을까요? 성경에서는 이름이 생각보다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특징을 잘 드러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발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처럼요. 또 어떤 이름은 그 사람의 아이러니 한 모습을 부각시켜 주기도 하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이었던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이라는 뜻이죠. 또 지난번 요나서 설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인데 정작 그는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여러분, 마르다라는 이름의 뜻은 아람어로 여주인, 주인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집안의 주인인 사람이죠. 주인, 진짜 주님이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장면입니다. “자기 집으로 예수를 영접하더라”.

이건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죠. 내가 인생의 주인처럼 살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서 주님,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라고 고백하며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했잖아요. 여기까지는 너무 아름다운 시작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오셨으니, 잘 섬기고 싶다. 정성껏 대접하고 싶다.이런 마음으로 이것저것 일을 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섬김의 출발점은 사랑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잘못 출발한 게 아니였어요. 너무나 잘~ 사랑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깁니다. 39절에 그 문제의 이유가 나오죠.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이 마르다의 일을 거들어서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마르다 혼자 많이 바빴겠죠. 마르다의 마음이 동요됩니다. 

 

40절에 성경은 마르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여기서 분주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περιεσπάτο(페리스파토)인데, 이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즉 여기서 마르다의 분주한 상태는. 단순히 일이 많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일이 마음을 끌고 가버린 상태를 드러내 주고 있죠.

처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그 일에 마음이 질질 끌려가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다 마음 속에 아마 이런 말들이 하나 둘 씩 올라왔던 것 같아요.

왜 나만 일하고 있지?”,“왜 마리아는 저기 앉아있는 거야?”,“주님은 이 상황이 안 보이시나?

왜 아무도 나를 안 챙겨주고, 신경 안 써주는 거지?”

그러다 결국 마르다는 폭발하듯이 예수님께 나아가 따지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40절 중간입니다.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

 

여러분 이 말 속에는 들어있는 마르다의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섬기다가 화나고 지치고 서운한 마음, 느껴지시죠? 우리도 이런 때가 많았을 것 같아서 충분히 공감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르다의 섬김이 귀하지만, 좀 이상한 게 느껴지죠.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혼자 있는 것 같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데 서운함과 분노, 남에 대한 비난이 올라온다는 것이 뭔가 어울리지 안 잖아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여러분, 이 마르다의 말 속에, 이 집의 주인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 것 같이 들리세요? 지금 예수님이 주인이신 것 같나요?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에 모셔 들였지만, 여전히 주인의 자리에서 주님, 마리아에게 말씀 좀 해 주세요. 제가 보기엔 지금 상황이 이렇고, 예수님은 이걸 좀 고쳐주셔야 합니다.” 하며 주인의 말투와 태도로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마르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모습이죠

예수님을 모셔 들였는데, 어느새 내가 다시 주인 자리에 앉아, 예수님께 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 말이에요. “ 예수님, 이건 이렇게 반드시 해주셔야 합니다. 저건 이 시간까지 꼭 이뤄주셔야하고요.” 그리고 내 뜻대로 예수님이 안 해주시면 서운해하고 화나 하고 그런 모습말이에요.


그리고 이런 마르다의 모습이 겉으로는 일이 많아서라고 보이지만, 그 말 뒤에는 더 깊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불안을 이해하려면 10장 앞부분에서 율법교사가 던진 질문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마르다 또한 마음속으로 비슷한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이 부담과 조급함이 그녀를 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마르다만의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종 반복해 온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개조항으로 만들어서 그것들을 다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왜요? 하나님을 위해, 의를 얻기위해 내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이었죠. 구약의 미가서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들려옵니다.

미가 6:6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렇게 어떤 일로, 행함으로,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야하나? 라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미가서 6:8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8)“사람아 주께서 선한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 많이 가져오느냐, 큰 걸 바치느냐,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와 함께 겸손히 걸어가라.(to walk humbly with your God (NIV).”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마르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41절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절 중간)

먼저, 예수님이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이건 꾸중하시 톤이 아니라, 애정 어린 목소리로 부르시는 톤이에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데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여기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성경 사본에는 앞에 붙어있는 몇 가지만 하든지가 없어요. 그냥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되어 있어요. 저는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가 더 말씀 문맥상 어울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기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고 하면 사실 해석이 엉뚱하게 빠질 수 있거든요. “봉사하고 섬길 때,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 갯수를 줄여야 한다. 몇 개만 하든지 하나 정도만 해야 한다. 이렇게 자꾸 얼마나 하느냐, 몇 개 하느냐의 문제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섬김의 갯수를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계신 게 아닌데 말이죠.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미가서의 언어로 옮기면 이럴 것 같아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무 많은 걸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나와 함께 걷는 것 그 하나로 충분하다.”

 

여러분, 이 말은 너의 섬김이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나는 나를 위한 일을 보다, 너를 더 원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제 맘에도 다가왔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 계신 청년분들처럼 20-30대에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짧은 인생에서 영원과 맞닿는 의미 있는 일이 선교라고 생각했고 선교를 다니면서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들을 보며 정말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맛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열정에 차서 그때 매년 단기 선교를 다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인도 선교를 5번 가고, 우크라이나,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을 다니며 하나님께서 빨리 선교지로 보내주시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는 나중에 많은 열매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더 많은 것들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기대와 다르게 결혼을 하고 영국이랑 미국에서 아이 둘 낳고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빨리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제 상황과 형편이 때론 너무 답답하고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마르다로 비유하자면, 주님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해드리고 싶은데 음식 재료도 없어서 그냥 맘만 분주하고 답답한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와중에 매일 새벽 기도를 다녔는데, 어느 날 새벽 기도 때, "하나님, 함께 선교 비전을 가지고 훈련 받았던 사람들,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은 다 목사님, 선교사님이 되어 멋지게 사역하시고 계신데... 저는 이게 뭐예요... 저는 왜 안 써주시나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치 하나님께서 제게 많은 말씀을 하시기보다, 딱 한 마디를 던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난 그냥 너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파도를 타고 멋지게 사역하고 싶었던 마음이, 이제는 그냥 주님과 함께 잔잔한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좋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뭘 하는 것보다,  날 원하시는구나... 라는 게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조금은 마르다의 자리에서 마리아의 자리로 옮겨 앉는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구나를 배우기 시작한 거죠. 오늘 본문 속에서, 바로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

마리아는 그동안 봉사하는 일을 회피하고, 예수님 앞에 앉아 논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다라는 표현은 그 당시 문화에서 제자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보통 남자 제자들이 스승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여자가 그 자리에 앉는 건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죠. 마리아는 일을 피한 게 아니라, 용기를 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예수님과의 관계적 우선순위를 붙든 사람이었어요.

 

그런 마리아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

여기서 좋은 편은 다시 말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말씀만 들어야 한다.”라든가, “봉사보다 말씀이 중요하다가 아니에요.

예수님과의 연결을 우선순위에 둔 사람은, 그분과의 연결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이미 우리보다도 먼저 우리와의 연결을, 우리와의 관계를 우선순위에 두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일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중요하듯이,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는 너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님 저도 주님을 원합니다"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처음 시작에, 요즘 섬기는 게 기쁨이 아니라, 점점 짐처럼 느껴지셨던 분들 있으시냐고 물었었죠. 사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여러분이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는 섬김 자체가 아니에요

섬김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놓친 섬김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섬기다가 마음이 지치고 화가 날 때, ‘지금 내 마음을 끌고 가는 것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일인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인가?’스스로에게 물어보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내가 주님과 함께 걸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 언제 내 마음이 비교와 서운함에 흔들렸나?’ 살펴보셨으면 좋겠어요. 힘들면 그냥 다 그만 둬야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발 앞에 다시 앉아,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셨던 그 부드러운 음성이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무 분주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너란다.

나는 너와 함께 있는 것, 그거면 내게 충분하단다.”

 

이 사랑의 음성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섬기다가 화가 나고 지쳤던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회복되고 ,

섬김이 짐이 아니라 기쁨으로,

마음이 다시 한번 따스해지는

대림절의 기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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