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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믿음이란? (1월11일 청소년부 설교 요약본) | 홍현희 | 2026-0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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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청소년부 표어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답게”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 정체성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신앙이란 결국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 고백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올해 청소년부 설교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차례로 살펴보며, 그들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첫 테이프를 끊을 인물은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납니다.
여러분, 제가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대부분은 한 마을에서 태어나 그 주변에 친척들이 모여 살며 서로 돕고 보호받다가, 그 마을에서 생을 마쳤어요.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집성촌’이라 해서, 이씨 마을, 최씨 마을처럼 같은 성씨의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모여 살던 곳이 있었던 것과 비슷해요. 그렇게 모여 살았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전이었어요. 그 시대에는 여권도 없고, 국가가 개인을 체계적으로 보호해 주는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척의 울타리를 떠난다는 것은, 곧 보호막 없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일이었어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어쩌면 나를 해칠지도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죠. 지난주에 우리 중3 친구들이 많이 졸업했는데요~ 만약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집에서 멀고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는 곳이라면 어떨 것 같나요? 낯설고 불안할 수 있겠죠. 그래도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고,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 자체를 통째로 떠나야 했던 거예요. 그러니 그가 느꼈을 낯설음과 두려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불확실한 미래와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무엇을 따라갔다고요? 여호와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든것이 다 이해된 후에 시작된 순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순종은 계산이 끝난 뒤의 결단이 아니라, 말씀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선택이었어요. 믿음은 머리로 모든것을 이해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순서를 거꾸로 하고 싶은 맘이 있죠~ 다 알고, 다 이해하면 순종할께요 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라는 거예요. 믿고 출발하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가 머무는 곳마다 제단을 쌓기 시작합니다. 12:7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12:8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러분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뭘까요? 예배를 드렸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나,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어요. 예배를 드렸어요. 여러분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주일날 그냥 습관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예배는 너무나 중요해요. 왜 중요하냐면, 예배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이며, 나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전도사님이 작년에 “선악과를 따먹기까지”란 설교를 했었는데 그때 죄의 본질적인 특성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는 사람있을까요? 죄는 있어야 할 자리를 뒤바꾸는 것.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기억하지 않고, 나의 나됨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었죠. 그래서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 이것이 죄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배는 다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의 나 됨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에요. 예배를 히브리어로 שָׁחָה (šāḥâ) 라고 부르는 데 이 히브리어는 원래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예요. 즉, - 예배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란 말이에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정확히 위치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맞춰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정렬하는 시간이에요. 근본적인 죄의 본질을 뒤짚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친구들도 어딜가나, 내가 어디 있든지 간에, 혹 여행을 가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놓치면, 결국 내 인생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나’로 다시 돌아오기 쉽기 때문이에요.
자, 아브라함의 삶은 사실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아서 한 번에 다루긴 어려울 것 같아 다음 주도 아브라함2 를 이어서 하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으로 빚어져 갔는지, 조금 더 구체적인 장면들을 통해 살펴볼 거예요. 아브라함도 실수도 하고, 두려움에 흔들리기도 했던 불완전한 사람이었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나가셨는지 다음 주에 더 나누도록 할께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2장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오늘은 그 정점에 있는, 아브라함 하면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로 떠오르는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2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불렀다고요 써 있죠?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이 시험하시려고 했다고?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근데 여기서 ‘시험’은 넘어뜨리려고 하는 유혹이 아니라, 믿음을 드러내고. 단련하는 테스트에 더 가까워요. 누군가의 충성, 신뢰를 드러내고 입증하려 하시려고 시험하신 것이죠. 이건 사탄이 죄로 끌어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시험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시험이죠.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을 어쩌면 믿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또한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이 시험을 통해 믿음의 점을 찍게 하시기 위해, 시험을 하시는 거에요. 근데 그 시험의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죠. 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힘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러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아들이었는지가 세 번이나 강조가 되어 표현하고 있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생각해봐요. 아브라함은 아이를 너무너무 갖고 싶었는데 100세가 되기까지 계속 기다리다가 얻은 아들이 이삭이에요. 그러니 진짜 아브라함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어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사랑했을지 상상이 가죠. 왜 우리 “딸 바보”라고 딸 낳은 아빠가 딸을 너무 좋아할 때 그렇게 이야기하곤 하는데, 아마 아브라함은 아들 바보였을 것 같아요. 너무너무 보기만 해도 좋았을 거예요.
근데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상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냥 언뜻 우리 이해가 잘 안가죠?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신게 이해가 되세요? 하나님이 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가 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여기서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하나님은 선을 그어주시길 원했어요.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지 않도록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때론 우리가 무언가를 너무 사랑하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냐고 물으실 때가 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럴때 우린 하나님이 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냐고 물으시지? 하나님은 내가 행복한 게 싫으신가?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다 “이삭”이 있을 수 있어요. 이삭은 나쁜 것만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좋은 것, 소중한 것,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일 가능성이 커요. 예를 들어 어떤 친구에게는 성적과 대학이 이삭일 수 있어요. 어떤 친구에게는 친구 관계, 인기, 인정이 이삭일 수 있어요. 어떤 친구에게는 연애, 누군가의 관심이 이삭일 수 있어요. 어떤 친구에게는 휴대폰, 게임이 이삭일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때 우리에게 물으세요.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니?” 이렇게 물으시는 건,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삭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이삭 때문에 우리가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네 손에서 내려 놓으라’고 하시지만, 동시에 이미 우리에게 줄 것을 준비하고 계신분이에요. 물론,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세요.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순서를 뒤바꾸지 않도록 선을 그어 주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불행해지길 원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들려오면 우린 참 당황스러워요. 아브라함도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3절입니다.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여러분,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방법이 있어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뒤로 미루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 고민해보겠다~, 생각해보겠다~ 하면 80-90 프로는 아니다란 결론으로 나와요. 이것저것 생각하면 순종하기 더 어려워지거든요. 이 말을 그냥 생각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순종을 미루지 말라는 것이에요. 믿음은 즉각 순종해야 더 하기 쉬워요.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창 22:3) 준비하고 길을 떠납니다. 긴 변명도, 조건도, 미루기도 없어요. 물론 아브라함 마음이 아무렇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에 순종의 방향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짐을 챙겨 떠났습니다. 그런데 모리아 땅을 향해 3일 길을 걸어가야했어요. 여러분, 아브라함이 그 3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겠어요? 그런데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걸음을 내딛였던 거예요.
여러분 이게 믿음의 여정이기도 해요. 즉각적인 순종으로 결단하고 믿음의 발걸음을 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에요. 믿음은 이렇게 다 이해되지 않아도, 고민이 되어도 멈추지 않고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드디어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종들은 거기에 두고,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가는데 이삭이 뭔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7절입니다. “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을 이삭에게서 들었을 때 얼마나 심장이 벌렁벌렁 했겠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8절에 대답합니다. 8절에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기서 아브라함은 ‘내가 해결하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로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언어예요.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하며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해되지 않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신뢰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신뢰입니다. 신약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이 아브라함의 신뢰를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가 번제로 바칠지라도 다시 살리실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종들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할 때도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고 말했어요. 여러분, 아브라함 혼자, 내가 돌아오리라 하지 않고,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말했죠. 그는 100세에 아이를 도저히 못 낳을 것 같은 그 나이에 불가능해 보이는 그 끝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어요. 그리고 그분은 불가능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했던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거죠.
아브라함이 이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잡아 번제 하려는 순간, 하나님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13절에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예비해 두셨죠(창 22:13).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하지 못하도록 선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순종하며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선하신 분이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번 한 해를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는 연습으로 살아갑시다. 불확실해 보여도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어도 하나님이 신실하심을 믿고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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