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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호에서 배신으로 (종려주일 청소년부 설교) | 홍현희 | 2026-03-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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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환호에서 배신으로: 변하는 마음, 변하지 않는 주님 설교본문: 마태복음 21:1-11 결단찬양: 찬양의 열기 모두 끝나면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여러분 지지난주에 BTS가 광화문, 경복궁 앞에서 공연을 했었어요. 타이틀도 엄청 거창하게 “왕의 귀환” 이렇게 하면서, 언론에서 계속 보도하고, 사고 대비 보호 병력도 많이 투입되고, 무대 설치며 엄청 시끌벅적하게 준비하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BTS팬들은 잔뜩 기대에 부풀었고 BTS가 나오자 열광했죠. 여러분, 성경에 이런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시대가 좀 달리지만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있어요. 어떤 장면일까요? 힌트! 오늘은 종려주일!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건 사람들이 그날 예수님을 열렬하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불러요.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 겉옷을 길에 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정말 뜨거운 분위기였습니다. 온 도시가 들썩들썩했고, 사람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 분위기를 오늘 본문 8-9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요. (마21:8-9)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분위기 느껴지세요? BTS 팬들 못지않게 군중들은 흥분의 도가니였어요. 왜 그랬을까요? 힌트! 여러분 오늘 본문이 21장 1절 부터죠~. 바로 앞에 20장 마지막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맹인 두 사람을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나와요~
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미 예루살렌 성 안에 가득 퍼져 있었어요.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셨대,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셨대, 눈먼 자를 보게 하셨대,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셨대~~ 그러니 사람들 마음속에는 기대가 가득했겠죠.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그 분이 오셨다. 이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이분이 우리를 답답한 현실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열광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힘 있는 왕처럼 크고 화려한 말을 타고 들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위엄 있게 등장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초라해 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집중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의 말씀, ,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곧 겸손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그렇게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에 맞춰 자신을 바꾸지 않으셨어요. 사람들의 기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강한 메시아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자기들을 괴롭히는 현실을 뒤집어 줄 정치적 구원자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깨뜨리시는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뜻을 이루어 줄 메시아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대한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예수님 그분 자체를 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원했던 거죠. 그래서 자기 기대와 맞아떨어질 때는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하고 외쳤지만, 자기 기대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는 마음이 금방 돌아섭니다. 그들은 자기가 기대한 메시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자 실망했고, 미워하게 됩니다. 우리 같이 마태복음 27:21-22절 읽어볼까요? (마27:21-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리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같은 입에서 환호가 나오고, 같은 입에서 죽이라는 저주의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왜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빨리 바뀔까요? 왜 환호가 배신으로 바뀔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던 것을 채워 주지 않고, 그들이 기대한 결과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사실 이것은 2천 년 전 군중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보면 예수님 자체보다 예수님이 내 삶에 가져다줄 결과를 더 원할 때가 많죠. “예수님, 성적 좀 올려 주세요.” “예수님, 친구 관계 좀 풀리게 해 주세요.” “예수님, 내가 원하는 대학 가게 해 주세요.” “예수님, 내가 힘든 문제 빨리 해결되게 해 주세요.” 물론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원했던 응답이 없을 때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느냐는 것입니다. 기도한 대로 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 쉽죠. 그런데 기도한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 왜 이러세요?” 하고 원망을 합니다. 예배 때는 손 들고 찬양하지만, 조금만 내게 어려움이 닥치면 마음이 불편해지면 금방 하나님이 멀게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 10절에는 아주 재밌는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소동하며 묻습니다. “이는 누구냐?”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환호했지만, 예수님의 소문은 들었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광은 있었지만 이해는 없었던 거죠. 반응은 컸지만 믿음은 얕았어요. 분위기는 뜨거웠지만, 주님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자동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 시간에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깊은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 분위기에 반응하는 것과 예수님을 진짜 주님으로 믿는 것은 다를 수 있어요. 사람들 따라 박수치고, 사람들 따라 눈물 흘리고, 사람들 따라 은혜 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 삶이 흔들릴 때, 내 뜻이 꺾일 때, 내 기대가 무너질 때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그것이 진짜 믿음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기대를 채워 주는 도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한 조력자나 해결사 정도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경배하고 따라야 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대하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로 가게 해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마음이 식어 버립니다. 내가 기대한 모습으로 역사하시면 찬양하고, 그렇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 2000년전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던 군중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무섭게도,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핵심은 단순히 “우리가 나쁘다”는 데 있지 않아요.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변덕스럽고 쉽게 돌아서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사람들의 환호가 곧 배신으로 바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알고 계셨어요. “호산나”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로 바뀔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도망갈 것도 아셨고, 군중이 돌아설 것도 아셨고, 자신이 조롱받고 버림받을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쉽게 변하는 것을 아시지만,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는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어버려요. 우리는 환호하다가도 돌아섭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 같다가도 결국 내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낼 때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우리를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 가셨습니다. 변하는 마음보다 주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이 더 크고, 우리의 배신보다 주님의 은혜가 더 큽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종려주일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때만 내가 주님을 환호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내 기대와 다르게 일하셔도, 내 기도가 더디게 응답 되어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가게 하셔도, 여전히 나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가?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좋아하는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기대와 다르게 일하셔도, 여전히 그분이 선하시고 옳으시고 나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진짜 믿음은 분위기가 뜨거울 때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가 실망할 때, 내가 기다려야 할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도 주님을 붙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전도사님이 예전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기도했을 때가 있었어요. 하나님 우리가 잘 돼서 사람들에게 영향도 많이 끼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 예수님 믿게 더 잘 설득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걸 일명 ”고지론“이라고 불러요. 쉽게 말해 “내가 1등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이런 거죠~ 그런데 그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어요. 현희야, 니가 엄청 잘 되어서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지? 근데 그러면 사실 사람들은 겉으로는 박수쳐줄지 몰라도 속으로는 시기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잘 안 된 사람들은 더 힘들어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니가 잘 안되고, 힘들고, 어려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찬양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때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한단다. 근데 정말 생각해보니 그런 거예요. 그리고 “교회 오빠”라는 영화가 생각났었어요. 이 영화는 실제 이관희 집사님의 삶을 다큐로 찍은 거였어요. 평범한 신앙인으로, 가족과 함께 안정된 삶을 살던 중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고 병은 빠르게 진행되어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 분의 모습을 담은 영화였죠. 그런데 그 영화가 사람들을 감동시킨 건 그분이 그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었어요. 그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나도 믿어보고 싶다고 많은 사람들을 생각케 했어요.
물론 이런 극단적인 고통 중에서는 정말로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리는 일단 너무 큰 것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여러 작은 어려움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종려나무를 흔들다 변해버린 군중의 모습과 내가 기대한 방식과 다를지라도 주님을 끝까지 붙들었던 “교회 오빠”의 이관희 집사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교회 오빠 이관희 집사님의 방향으로 우리도 기울어지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친구들 중에, 혹시 요즘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었어요.” “나는 열심히 주님을 믿어 보려고 노력했는데 내 어려운 상황은 너무 안 좋아요.” “나는 하나님이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하면서 하나님께 조금은 원망하는 맘이 들었던 친구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 앞에서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가장 깊이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요. 군중은 강한 왕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왕으로 오셨어요. 군중은 당장 눈앞의 문제, 해결할 메시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 시켜줄 메시아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문제, 곧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메시아로 오셨어요. 사람들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오해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군중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오늘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시죠. 오늘 우리 이런 기도를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주님, 내가 주님을 결과 때문에 사랑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주님을 내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대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기대한 모습의 예수님만 찾지 않게 해 주세요. 내 마음은 자주 변해도,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붙들게 해 주세요.” 이제 다음 한 주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의 환호 뒤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고난주간, 다시 한번 “나의 환호는 진짜였나? 나는 내 뜻과 맞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하고 배신한 군중과 같진 않은가?” 되돌아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예수님을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이 마음을 담아서 같이 “찬양의 열기 모두 끝나면”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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