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9일(수) 요한삼서 1장 | 이평화 | 2025-03-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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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요한일서, 이서, 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매일 한 장씩 묵상합니다. 본문을 세심히 살피면서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묵상은 간단한 예시입니다. 말씀을 차분히 읽고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요한삼서 1장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3월 19일(수) 요한삼서 1장 <핵심묵상 구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3-4) 요한삼서는 요한이서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서신의 분량도 파피루스 한 장에 들어갈 만한 분량이고, 자신을 장로로 소개하고 있으며, 서신 말미에 편지로 다 하지 않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열망을 피력하기도 합니다(요이 12; 요삼 13~14), 또한 순회 전도자(교사)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강조에 있어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이서가 미혹하는 자들을 환영하고 접대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 역점을 둔다면, 요한삼서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사자들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즉 요한삼서는 요한이서의 소극적인 금지에 대한 적극적인 보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단들이 초대교회의 환대를 악용한다고 해서 신실한 설교자와 교사들에게 환대를 보이지 않는 것에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공동체는 아마도 이미 거짓 교사들이 침입하여 한 파를 구성했으며, 그 수장은 디오드레베(9절)이고 신실한 지도자인 가이오(1절)는 소수파로 전락한 상황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신실한 사역자인 데메드리오를 자신의 편지와 함께 파견합니다. 이렇게 세 인물을 중심으로 요한삼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가이오입니다(1~8).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다(1,2,5,11).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모두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는, 가이오에 대한 요한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디오드레베에 의하여 소수파로 내몰리고,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는 가이오를 위로하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이런 요한의 사랑은 가이오에게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라는 표현은 ‘진정으로’라기보다, ‘진리 안에서’를 의미합니다(1). 사도 요한과 가이오를 묶어주는 것은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진리에 바탕을 둡니다. 요한은 가이오의 영적 상황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미 그의 영혼이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 그러나 요한은 가이오의 육신적 형편도 잘 풀리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2). 이것은 형통/번영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순회 교사들을 통해서 가이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는데(3), 그것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증언이었습니다. 요한에게는 믿음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4; 요이 4). 가이오는 형제들(나그네 된 자들, 순회 교사들)에게 신실하게 행동하였습니다(5). 그래서 그들은 가이오의 사랑을 기억하고 증거하였습니다(6). 이 말은 가이오에게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이오가 그들을 전송한 것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동한 것이었습니다(6).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선교사들을 대하고 보내는 태도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서 보내는 것이 합당한 전송입니다. 당시 순회 교사들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순회하며,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 파송 전통(마 10)에서 이어집니다. 교회가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며 환대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그들의 수고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9~10).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라는 말이 요한이서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9). 요한이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이란 표현은 디오드레베를 설명하기 좋은 말입니다(9). 디오드레베는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에게 그의 불순한 동기와 신자답지 못한 행동을 폭로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를 위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자기 욕심으로 교회를 허무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란 표현은 손 대접(환대)이라는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버린 것을 지적합니다(9). 그는 요한이 보낸 자들을 거절하였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진리와 사랑에서 벗어난 자였습니다. 그는 대접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가이오처럼 접대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사도를 근거 없이 비방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는 디오드레베의 손에 좌지우지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끝으로 데메드리오에 관한 언급입니다(11~12). 사도는 악한 디오드레베를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가이오에게 다시 부탁합니다(11).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11)”는 말씀은 요한의 분명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디오드레베는 불신자입니다. 사도는 가이오를 격려하려고 한 신실한 사역자를 언급합니다(12). 데메드리오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증합니다. 데메드리오는 삼중의 칭찬을 받습니다(12). 모두가 다 그를 칭찬했지만, 중요한 것은 진리의 증거입니다. 진리는 말씀이신 예수님 혹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사도 자신도 그를 칭찬합니다. 마지막으로 대면하여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13~14),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는 유대적 인사로 서신은 끝을 맺습니다(15). 분쟁이라는 복잡한 상황에 있던 가이오에게 이 인사는 의미심장했을 것입니다. 요한삼서는 교회를 자기의 전유물로 삼고 있거나, 삼으려는, 모든 목사와 장로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사도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그들은 칭찬받아야 마땅하고 격려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 묵상: 나는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사역자입니까? ● 기도: “주여, 주 앞에서 서는 날, 잘 했다 칭찬받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 침묵과 머뭄 : 말과 생각을 그치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응시하며 잠시 머물러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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